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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오딧세이] 수학은 어떻게 허리케인 재난민을 도왔나
[과학 오딧세이] 수학은 어떻게 허리케인 재난민을 도왔나
수학ㆍ정보통계학부2015-04-05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지나간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한 마을 모습이다. 당시 미국 적십자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기부금을 내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했다. 강력한 비바람이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등 미국 남부 지역의 주(州)들을 초토화했다. 덩달아 미국 적십자의 인터넷 홈페이지도 마비가 됐다. 재난 지역에 기부금을 내려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리면서 트래픽이 평소보다 14배 이상 증가했던 것이다.

기부금을 받을 수 없게 된 적십자는 콘텐츠 딜리버리 네트워크 업체인 아카마이 테크놀로지에 급히 연락했다. 아카마이 테크놀로지는 ‘부하 관리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8시간 만에 적십자 홈페이지를 정상으로 되돌렸다.

부하 관리 소프트웨어는 트래픽이 인터넷 속도 둔화의 주원인인 ‘미들 마일(middle mile)’를 우회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미들 마일은 인터넷 관련업체와 개인 사용자 컴퓨터를 잇는 구간으로, 트래픽이 몰리면 인터넷 병목현상이 일어난다. 이 소프트웨어는 확률 알고리즘, 조합최적화, 그래프이론 등 다양한 수학 이론을 활용해 트래픽이 지나치게 몰릴 때 미들 마일을 통하지 않는 새로운 경로를 찾아낸다.

적십자는 2009년 캘리포니아 산불과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도 아카마이 테크놀로지의 도움을 받아 트래픽 급증을 무사히 넘겼다.

산업계에서 수학을 활용한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이달 2일 대전 유성구 전민동 국가수리과학연구소에서 열린 제1회 정책포럼에서는 수학이 산업 영역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소개됐다.

◆ 수학 활용해 세금 더 걷고, 바닷속 숨은 석유 찾아낸다

미국의 대표 IT솔루션 회사 IBM은 2009~2010년 미국 뉴욕주 세무국을 위해 ‘세금 징수 예측분석 시스템’을 개발했다. IBM은 자신들의 체스 프로그램 ‘딥 블루’와 제퍼디 게임을 하는 인공지능 ‘왓슨’의 기능을 합쳤다.

이 시스템은 전화, 방문, 영장, 징수 등 세무국의 업무와 납부, 이의 신청, 파산 선언 등 납세자의 반응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최적화된 세금 징수 솔루션을 제시한다. IBM은 ‘마르코프 프로세스’라는 수학 이론을 사용했다. 미래의 상태가 현재에 의해 결정되며 과거는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확률 이론이다.

즉 납세자의 현재 상태를 토대로 추후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다. 납세 의무가 있는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세무국이 얻을 기대수익까지 계산해냈다. 뉴욕주는 이 시스템을 사용한 이후 직원 채용을 하거나 추가 지출 없이 세입을 기존보다 8% 늘렸다. 세무국 직원이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소요하는 시간도 9.3% 단축시키는 효과를 거뒀다.

미국 석유업체 모빌과 유노컬은 인도네시아 마카사르 해협에서 석유 매장지를 찾아냈다. 수학을 기반으로 한 유역 모델링 프로그램을 활용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은 북해 지역의 석유 시추 장면. /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수학을 활용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심해(深海)에서 석유 매장지를 찾아낸 사례도 있다.

1990년대 후반 미국 석유업체인 모빌과 유노컬은 인도네시아 중부 보르네오섬과 술라웨시섬 사이에 있는 마카사르 해협의 심해 시추 권리를 사들였다. 당시 이곳은 유기물질이 함유된 퇴적암인 ‘근원암’의 상태가 석유 생성에 부적합하다는 인식 때문에 어느 국가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모빌이 개발한 ‘유역 모델링(basin modeling)’ 프로그램은 이 지역이 석유를 생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암석의 나이와 압력, 온도, 다공성, 밀도 등 석유 탄생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바탕으로 이런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시추 결과 프로그램의 예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시추를 맡은 유노컬은 2003년 이 지역에서 하루 2만 배럴 규모의 석유를 뽑아냈다. 마카사르 해협은 인도네시아 최초의 심해 유전으로 기록됐다. 미국산업응용수학회(SIAM)는 “유역 모델링 프로그램에는 미분방정식, 확률뿐 아니라 열 흐름, 화학반응 속도론 등 기초수학과 공업수학의 기본 이론이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미국 콘크리트 기업인 버지니아 콘크리트는 수학자들을 영입해 ‘트럭 파견 자동화 시스템’을 개발했다. / 위키피디아 커먼스 제공

미국 콘크리트 기업인 버지니아 콘크리트는 2002년 배달용 트럭 운용에 어려움을 겪었다. 콘크리트를 트럭 용기에 담아도 딱딱하게 굳는 걸 완벽하게 막을 순 없었다. 굳기 전에 배달하려면 두 시간 안에 도착해야 하는데, 주문이 갑작스럽게 취소되는 경우가 많아 애를 먹었다.

이 회사는 조지메이슨대와 디사이시브 애널리틱스 코퍼레이션의 수학자를 영입해 ‘트럭 배차 자동화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수학자들의 분석결과 트럭을 한 공장에 집결시키는 것보다 주문자에게 가장 가까운 공장에 분산 배치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취소될 가능성이 높은 주문에는 일단 ‘유령’ 트럭을 배치한 뒤 나중에 주문이 취소되지 않을 때 진짜 트럭을 배차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됐다.

이렇게 개발된 시스템이 배차한 스케쥴에 따라 트럭을 운용한 결과, 운전자 한 사람이 하루에 배달하는 콘크리트의 양이 종전보다 26% 늘었다.

박형주 포스텍 수학과 교수는 “픽사의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수학자들이 참여해 해상도를 수학적으로 조절하는 역할을 했다”며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가 재기에 성공하는 데 수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아예 수학 경쟁력으로 사업에 뛰어드는 벤처들도 늘고 있다. ‘피자이(Feedzai)’는 모든 상업 거래를 실시간으로 감시해 사기 행위를 탐지하고, 구매자에게 위험점수(fraud score)를 보여준다. ‘블룸리치(BloomReach)’는 사용자 선호도에 따라 아이템을 배치하는 맞춤형 동적(動的) 페이지를 제공하고 있다.

또 ‘퍼스웨이(Pursway)’는 소셜네트워크에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고객이 누구인지 네트워크 이론을 적용한 방식으로 식별해 업체에 알린다.

◆ “주요국들 산업수학연구소 설립 열풍…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수학과 산업을 연계하려는 노력이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수학을 기반으로 한 빅데이터 분석 산업이 커지는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한된 영역에서만 산업수학이 활용되고 있어 범위 확대가 필수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창옥 카이스트(KAIST) 수리과학과 교수는 “주요 경제 대국들은 이미 다양한 산업수학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며 “산업수학 분야 가운데 유망한 신산업을 발굴해 국가 차원의 지원 방안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블룸리치’는 사용자 선호도를 수학적으로 분석한 뒤 홈페이지에 노출되는 아이템들을 개인 특성에 맞춰 배치한다. / 블룸리치 제공

실제로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2007년 수학 분야에서 도전해야 할 23개의 과제를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대부분은 산업수학이며, 대수기하학과 정수론 같은 순수수학 분야도 포함됐다.

일본은 메이지대와 큐슈대에 산업응용수학 연구소를 설치하고 산업수학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전국 각지에 여러 개의 산업수학 연구기관을 설립한 뒤 지원하고 있다.

이준엽 이화여대 수학과 교수는 “확률변수와 미분방적식에 고속계산기법을 접목해 금융산업의 혁신을 이뤘고, 최적경로 알고리즘은 내비게이션을 탄생시켰다”며 “생명과학, 의료, 복지 등 수학과 접목해 혁신할 수 있는 분야는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전준범 기자 bbeom@chosunbiz.com]